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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의 바위를 굴리는 사람들

바위를 굴리는 사람들에게

시지프는 신들의 벌을 받았다.
영원히 바위를 산꼭대기로 굴려 올려야 하는 형벌.
정상에 거의 다다르면, 바위는 다시 굴러떨어진다.
그리고 다시 굴린다.
끝없이. 의미 없이.

💡 끝없이. 의미 없이.
그런데도 다시 굴린다.

나는 이 신화를 좋아한다.
아니, 좋아한다기보다 **나 자신을 여기서 본다.**


나의 바위

만성골수백혈병 진단을 받았을 때,
좋아하던 것들을 내려놔야 했다.
스케이트보드. 축구. 무리한 운동들.

매일 약을 먹는다.
매일 몸 상태를 확인한다.
매일 “오늘도 괜찮은가”를 묻는다.

이게 내 바위다.
정상에 올려놓을 수 없는.
다 됐다 싶으면 다시 굴러떨어지는.

💡 시지프의 바위는 벌이 아니다.
그건 삶 그 자체다.

그런데, 왜 굴리는가

카뮈는 말했다.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한다.

시지프가 바위를 굴리는 건
**벌을 받아들여서가 아니라, 반항이다.**

신이 무의미하다고 했지만,
나는 의미를 만든다.
신이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나는 오늘도 굴린다.

💡 굴리는 행위 자체가 반항이다.
“그래도 나는 계속한다”는 선언.

두 아이라는 바위

나에게 바위는 또 있다.
두 아이.

50대에 아빠가 됐다.
사람들은 가끔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48년의 나이 차이.
그 차이를 안고 매일 굴린다.

밥 먹이고, 재우고, 놀아주고,
아프면 병원 가고, 숙제 봐주고,
“아빠 사랑해?”라는 질문에 “응, 사랑해”라고 답하고.

이것도 정상에 도달할 수 없다.
“완벽한 아빠”라는 정상은 없으니까.
그래도 매일 굴린다.

💡 사랑하는 것도 바위를 굴리는 일이다.
끝이 없고, 정상이 없다.
그래도 굴린다.

모두의 바위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 시지프다.

출근하고, 퇴근하고, 다시 출근하는 사람.
아이를 키우고, 부모를 돌보는 사람.
아픈 몸을 이끌고 하루를 버티는 사람.

모두 각자의 바위를 굴린다.
정상에 닿지 못할 걸 알면서도.

💡 바위를 굴리는 모든 사람은 존엄하다.
그 행위 자체가 삶의 증명이니까.

오늘의 산책을 마치며

나는 cezips라는 아이디를 쓴다.
시지프(Sisyphus)에서 따왔다.

내가 시지프라서가 아니라,
**시지프처럼 살고 싶어서.**

포기하지 않고,
의미를 스스로 만들고,
오늘도 바위를 굴리는 사람.

당신도 아마 그럴 것이다.
각자의 바위를 안고.
각자의 산을 오르며.

💡 정상에 닿지 못해도 괜찮다.
굴리고 있다는 것.
그게 이미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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