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1시. 처방전을 받았다.
사진을 찍었다. 메모 앱에 저장했다.
헬스노트는 안 열었다.
— 그게 내가 만든 앱이다.
무서웠다
이건 디자인이 안 예뻐서가 아니다.
내가 디자인 문제로 안 들어간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다.
내가 안 들어가는 진짜 이유는 — 한 번 기록하려면 앱을 열고, 락을 풀고, 메뉴를 찾고, 폼에 들어가서, 숫자를 치고, 단위를 고르고, 저장하고,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곱 단계.
그 일곱 단계마다 내 뇌가 묻는다. “이거 꼭 지금 해야 돼?”
피검사 하면 다 나오는데. 처방전 한 장이면 약 정보가 다 있는데. 내가 굳이 일곱 단계를 거쳐서 입력해야 하는 이유가 — 솔직히 없다.
심리학에서는 이걸 인지부하 이론이라고 부른다. 한 행동의 단계가 많을수록 그 행동은 안 일어난다. 노인은 더 심하다. 작업 기억이 줄어들기 때문에.
내가 누구보다 노인 가까운 71년생인데, 내가 만들고 내가 안 쓴다.
이게 시니어 헬스앱 6개월 잔존율이 5% 미만인 진짜 이유다.
근데 됐다
지난주에 한 가지를 깨달았다.
내가 안 들어가는 게 — 게으름이 아니라 합리적 판단이라는 것.
피검사 1회 = 사용자 노력 0, 데이터 정확도 100.
앱 입력 1회 = 사용자 노력 100, 데이터는 내 기억과 의지에 의존.
비용/이익 계산이 끝났다. 앱 입력은 진다.
그러면 답은 정해졌다.
앱이 사용자의 노력을 0으로 만들어야 한다.
방법은 이미 있다.
- 처방전 사진 한 장 → AI가 약 정보를 다 뽑는다
- 피검사 결과 PDF → AI가 수치를 다 등록한다
- 혈압계 화면 사진 → AI가 숫자를 읽는다
새 헬스노트의 첫 화면에는 한 줄만 떠야 한다.
입력하지 마세요. 사진만 주세요.
그리고 한 가지 더.
입력 대신 — 하루 한 줄.
“오늘 어땠어요?” 표정 세 개. 30초.
그게 전부다. 일곱 단계가 아니라 한 탭.
대신 그 한 탭이 일주일 쌓이면, 자녀에게 자동으로 다이제스트가 간다. “어머니 이번 주 컨디션 보통이셨어요.” 시니어는 자녀에게 카톡 한 통 받는다. “엄마 오늘 컨디션 어떠셔?”
기록 → 가족이 안다 → 카톡이 온다 → 기록할 이유가 생긴다.
이게 자기결정성 이론에서 말하는 관계성이다. 기록이 외로움을 풀어주면, 사람은 다시 기록한다.
차트가 아니라 사람.
당신도 된다
내 첫 헬스노트는 망했다. 내가 안 쓰니까.
근데 망한 이유를 알았으니까, 다음 버전은 안 망한다.
당신이 헬스앱을 만들든, 가계부를 만들든, 일기 앱을 만들든 — 사용자가 안 들어가는 건 디자인 문제가 아니다. 사용자가 합리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거다.
길은 둘뿐이다.
- 입력을 0으로 만든다 (사진·연동·자동)
- 입력 한 번이 즉시 사회 보상으로 돌아온다 (가족·친구·기록의 의미)
이 둘이 안 되면, 백번 디자인 바꿔도 사용자는 안 돌아온다.
내가 만든 앱에 내가 안 들어가는 걸 보고 나서야 이걸 깨달았다.
늦었다. 근데 늦깎이연구소니까. 늦게 깨달아도 괜찮다.
다음 버전 헬스노트에서는 — 처방전 사진 한 장만 주면 된다.
만약 당신도 자기 앱이 안 켜진다면,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다. 당신 사용자도 마찬가지다.
처방전 사진 한 장.
그게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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