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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시대가 끝나고, 나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서문을 대신하여


1. 시대

운전을 하다 문득 이런 문장이 떠올랐다.

우리의 시대가 끝나고 나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무슨 뜻인지 나도 한참을 생각했다.

한때는 모두가 같은 시간표를 썼다. 몇 살에 배우고, 몇 살에 취직하고, 몇 살에 자리를 잡는지가 정해져 있었다. 그 시간표를 지키면 안전했고, 어기면 늦은 사람이 되었다.

나는 그 시간표를 여러 번 어겼다.

그런데 지금은 시간표 자체가 흐려지고 있다. 세상은 점점 더 개인 쪽으로 기울고, 앞으로는 더 그럴 것이다.

이것은 해방일 수도 있고, 각자도생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되는지는 그 다음 문장에 달려 있다.


2. 도구

AI는 개인에게 지적 생산수단을 돌려주었다.

이 말을 가볍게 하고 싶지 않다. 오랫동안 지식은 기관에 속해 있었다. 대학에, 회사에, 조직에. 개인은 그 앞에서 언제나 부족한 쪽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마음만 먹으면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지적 범위가 문명 이래 가장 넓어졌다.

다만 하나는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도구가 곧 시간은 아니다.

두 아이를 키우고, 몸으로 일하고, 밤에 코드를 쓰는 사람에게 “마음만 먹으면”은 가장 가벼운 말이 아니라 가장 무거운 조건이다. 능력은 열렸는데 조건은 아직 그대로다. 구조는 그 자리에 있고 도구만 먼저 도착했다.

늦깎이연구소는 그 시차를 견디는 법을 기록한다.

구조를 바꾸겠다는 말이 아니다. 먼저 도구를 잡아본 사람이 기록을 남겨서, 뒤에 오는 사람의 진입 비용을 조금 낮추는 일. 내가 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다.


3. 출현

혼자 유능해지는 것은 아직 역사가 아니다.

한 사람이 세계에 등장하는 방식은 성장이 아니라 출현이다. 누군가 보는 자리에서 말하고, 만들고, 남기는 것.

그래서 기록한다.

잘 되는 것만 쓰지 않는다. 실패한 실험, 팔리지 않은 상품, 다시 짠 코드, 틀렸던 판단을 함께 쓴다. 성공담만 남으면 그것은 광고이지 기록이 아니다.

세계에 대해서도 쓰려 한다.

선악의 이분법이나 진영의 이분법으로 사건을 나누는 글은 이미 충분하다. 나는 사건보다 개념을 앞에 두려 한다. 공정이란 무엇인지, 책임은 언제 끝나는지, 세대는 실재하는 집단인지 만들어진 범주인지.

취재는 하지 않는다. 그건 내 몫이 아니다.
대신 사람들이 쓰는 말 속에 어떤 전제가 숨어 있는지를 본다.

진영에 휘말리지 않는 방법은 중간에 서는 것이 아니다.
판단의 근거를 끝까지 공개하는 것이다.


4. 조력자

이 모든 것의 기준은 사실 하나다.

내 아이들이 자라는 방향.

나는 아이에게 답을 주지 않으려 한다. 대신 판단하는 법을 보여주려 한다. 아버지의 역할은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조력자라고 생각한다.

늦깎이연구소도 같다.
방문자에게 정답을 팔지 않는다. 판단의 과정을 기록한다.

연구소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가 여기 있다. 학원도 아카데미도 아니다. 아직 모른다는 뜻이다.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같이 모르는 곳이다.

‘올바른 성장’이라는 말은 쓰지 않기로 했다. 올바름을 내가 정하는 순간 조력자가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대신 정직한 성장이라고 부르려 한다.
실패도 기록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고, 늦은 것은 늦었다고 하는 것.

아이가 자라서 나와 다른 결론에 이른다면,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다.


5. 늦게 피어도 더 단단하게

늦음이 단단함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늦음을 견디게 한 반복이 단단함을 만든다.

바위를 밀어 올리는 사람의 성실함은 빌려오되, 나는 그 바위가 조금씩 자란다고 믿는 쪽이다. 반복은 되돌아가는 일이 아니라 앞을 향해 다시 받는 일이다.

우리의 시대가 끝나고 나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나의 시대는, 다시 누군가의 우리가 되기 위해 시작되었다.

혼자 피는 것이 아니라, 피어서 다른 사람이 필 수 있는 자리가 되는 것.

그것이 늦깎이연구소다.


늦깎이연구소 · 시지프

이야기의 다음 장 → Groo를 소개합니다

조력자라는 자리 → 할아버지 같은 아빠의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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