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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서에 나이를 적었다. 칸이 하나 모자랐다.

지원사업 신청서를 쓰다 보면 나이를 적는 칸이 나온다.

그리고 그 아래 안내문이 붙어 있다. 청년은 만 39세 이하.

나는 그 칸에 해당하지 않는다. 오래전부터 해당하지 않았다.

이상한 건, 그 숫자를 볼 때마다 잠깐 멈춘다는 거다.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아는 걸 확인받는 일에는 따로 힘이 든다.


1. 늦었다는 말이 성립하려면

늦음은 시계의 문제가 아니다.

시계는 늦음을 모른다. 시계는 그냥 흐른다. 늦음이라는 말이 생기려면 비교할 표가 하나 있어야 한다. 몇 살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적힌 표.

그 표가 있어야 “늦었다”가 말이 된다.

기차가 늦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시간표가 있기 때문이다. 시간표가 없으면 그 기차는 늦은 게 아니라 그냥 오는 중이다.

그러니까 내가 늦었다고 느낄 때마다 나는 사실 시계를 본 게 아니었다. 표를 본 거였다.


2. 그 표는 언제 무너지나

시간표가 힘을 가지려면 조건이 하나 필요하다. 도착지가 하나여야 한다.

모두가 같은 역으로 가야 시간표가 의미를 가진다. 가는 곳이 다르면 같은 시각표를 나눠 쓸 이유가 없다.

그런데 지금은 도착지가 흩어졌다.

무엇이 성공인지, 무엇이 자리를 잡은 건지, 서로 다른 답을 들고 산다. 도착지가 흩어지면 시간표도 같이 흩어진다. 늦음도 따라서 흩어진다.

다만 여기서 정직해야 할 게 있다.

제도는 아직 표를 들고 있다. 신청서의 그 칸이 증거다. 세상이 개인 쪽으로 기울었다고 해서 서류가 같이 기운 건 아니다. 도구는 먼저 도착했는데 구조는 그 자리에 있다.

늦음은 이 시차 안에서 살아 있다.


3. 그래서 나는 이렇게 판단한다

늦음은 허구가 아니다. 그리고 운명도 아니다.

늦음은 조건이다.

근거를 둘 대겠다.

하나. 늦음은 언제나 비교로만 측정된다. 절대적인 늦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혼자 있는 사람은 늦을 수가 없다. 같은 나이가 어떤 칸에서는 늦음이고 어떤 칸에서는 아니다. 청년 기준은 사업마다 다르고 몇 년 사이에 바뀌기도 한다. 표가 스스로 자기가 만들어진 물건이라는 걸 실토하는 셈이다.

둘. 그런데 늦게 시작한 게 불리한 건 사실이다. 이건 인정해야 한다. 축적된 시간은 실재하고, 체력도 실재하고, 남은 시간도 실재한다. 늦음이 그냥 착각이라고 말하면 그건 위로가 아니라 거짓말이다.

둘을 합치면 이렇게 된다. 늦음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판정이 아니라, 내가 지금 서 있는 자리의 조건이다. 조건은 사람을 규정하지 않는다. 대신 계산에 넣어야 한다.

그러면 다음 질문이 온다. 조건이라면, 얼마나 밀 수 있는 조건인가.


4. 늦음의 아름다운 판본들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유혹 하나를 통과해야 한다.

늦음을 옹호하는 논리는 도처에 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모을 수 있다.

음악. 대위법에는 지연화음이라는 게 있다. 앞 화음의 음 하나가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고 붙잡혀 있는 것. 그 순간 불협화음이 생기고, 한 박자 늦게 해결된다. 그런데 그 늦음이 없으면 해결의 쾌감도 없다. 제때 도착한 음은 아무 사건도 아니다. 푸가는 더 노골적이다. 응답 성부는 반드시 늦게 들어온다. 동시에 들어오면 그건 푸가가 아니라 그냥 화음이다. 늦음이 형식의 조건이다.

수학. 무한급수는 목표값에 영영 도착하지 않으면서 다가간다. 어느 항에서도 도착하지 않는다. 그런데 극한으로는 도착한다. 여기서는 도착 시점이 없다는 게 결함이 아니다. 수렴은 도착이 아니라 접근의 성질이기 때문이다. 늦음을 판정하려면 도착 시각이 있어야 하는데, 애초에 그런 게 없는 구조가 있다.

바둑. 후수는 손해다. 그건 분명하다. 그런데 두터움은 늦게 계산되는 자산이다. 초반에 실리로 앞선 쪽이 중반에 뒤집히는 건 이 시차 때문이다. 세력은 지금 집이 아니라 나중에 집이 될 가능성이니까. 늦어도 괜찮다는 말이 아니다. 늦게 계산되는 가치가 따로 있다는 말이다.

생물. 인간은 성숙이 극단적으로 느린 종이다. 다 자라서 태어나는 동물은 태어난 세계에서만 살 수 있다. 늦게 완성되는 동물은 세계가 바뀌어도 따라간다. 늦음과 학습 능력은 함께 왔다. 늦음은 인간이 치른 비용이 아니라 인간이 된 방식이다.

넷을 늘어놓고 보면 꽤 그럴듯하다. 늦음은 형식이고, 성질이고, 자산이고, 방식이다.

그리고 이 목록은 얼마든지 늘릴 수 있다.


5. 그런데 이걸 다 모으면 무슨 일이 생기나

헤세의 마지막 소설에 유리알 유희라는 게 나온다.

음악과 수학과 천문학과 언어를, 서로 다른 영역의 형식을 하나의 주제 아래 대응시키는 유희다. 그것을 하는 사람들만 모여 사는 지역이 있고, 그 유희의 정점에 명인이 있다.

방금 내가 한 게 정확히 그거다. 늦음이라는 주제를 걸고 음악과 수학과 바둑과 생물학을 대응시킨 것.

소설에서 그 유희의 명인이 된 사람은 정점에 오른 다음 그곳을 떠난다. 이유는 간단했다. 유희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고 아무 위험도 감수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가 마지막에 한 일은 한 소년의 가정교사가 되는 것이었다.

지연화음도 수렴도 두터움도 참이다.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런데 그걸 다 모아놓아도 신청서의 나이 칸은 사라지지 않는다. 밤일하고 새벽에 뭔가 해보려는 몸이 덜 피곤해지지도 않는다.

유희는 세계를 설명하지만 세계를 살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4장은 틀린 게 아니라 부족하다. 늦음을 아름답게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늦음이 왜 아픈지는 하나도 설명하지 못했다.


6. 늦음이 아팠던 진짜 이유

소설 속 그 세계는 나이로 사람을 걸렀다.

소년기에 선발되지 못하면 평생 못 들어간다. 뒤늦게 지원하는 길 같은 건 없다. 지식으로 가는 문이 특정 시기에만 열려 있었다.

이게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늦음이 치명적이었던 건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 아니라, 문이 한 번만 열렸기 때문이다. 문이 한 번만 열리면 늦음은 곧 영구 배제가 된다. 늦음의 무게는 시간에서 온 게 아니라 문턱의 개폐 방식에서 왔다.

오래 그랬다. 지식은 기관에 속해 있었다. 대학에, 조직에, 자격에. 그리고 그 기관들은 대체로 나이로 입구를 관리했다.

지금은 좀 다르다.

마음만 먹으면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지적 범위가 전에 없이 넓어졌다. 선발도 없고 정원도 없다. 명인이 되려고 소년기에 뽑힐 필요가 없다.

문턱이 사라지면 늦음의 뜻이 바뀐다.

문이 한 번 열리는 세계에서 늦음은 명사다. 늦은 사람이라는 신분. 문이 계속 열려 있는 세계에서 늦음은 부사가 된다. 늦게 시작했다는 서술.

신분은 못 바꾼다. 서술은 다음 문장으로 이어진다.

여전히 불리하다. 축적된 시간은 실재한다고 3장에서 이미 인정했다. 하지만 불리한 것과 배제된 것은 완전히 다른 물건이다.


7. 그래서 남는 것

문이 열렸다고 아무나 들어가는 건 아니다.

문턱이 없어진 건 지식 쪽이지 자원 쪽이 아니다. 시간과 체력과 생계는 여전히 문턱이다. 이제는 못 들어가는 이유가 자격이 아니라 여력이 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여력을 뜯어보면 시간이 전부가 아니다.

시간이 있어도 조각나 있으면 못 쓴다. 처리할 일이 배경에서 계속 돌면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도 사고력이 깎인다.

몸은 안 밀린다.

나는 아픈 사람이고 그건 협상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하나가 더 있다.

이걸 해도 된다고 스스로에게 내주는 허가.

나이 들어 뭔가를 새로 시작하는 게 사치처럼 느껴지는 감각. 돈 안 되는 걸 붙들고 있는 데 대한 죄책감. 시간이 생겨도 그 시간에 쉬어야 할 것 같은 사람은 그 시간을 못 쓴다.

시간은 내가 줄 수 없다. 몸도 못 고친다. 생계도 어쩌지 못한다.

허가는 조금 다르다. 허가는 남의 기록에서 온다.


8. 그리고 그 앞에 하나 더

여기까지 쓰고 나서 휴게실에 앉아 있었다.

야간 작업 전 대기 시간이었다. 같은 공간에 여러 사람이 앉아 각자 쉬고 있었다.

그때 스스로에게 물었다. 저 사람들에게는 허가가 없어서 저러고 있는 걸까.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이 글은 분석이 아니라 판정이 된다.

밤새 일할 몸으로 대기실에 앉아 쉬는 건 여력의 정확한 사용이다. 그 한 시간에 책을 못 읽는 게 아니라, 그 한 시간은 복구 시간이다. 내가 지금 이걸 쓰고 있는 건 내가 나은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이게 내 일이기 때문이다. 같은 시공간이 두 사람에게 다른 종류의 시간인 것뿐이다.

그리고 허가보다 앞에 하나가 더 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그런 것이 있다는 걸 아는 일.

허가는 문 앞에 선 사람의 문제다. 하고 싶은데 해도 되나 망설이는 상태. 그런데 그 전에, 애초에 그 문이 시야에 없는 상태가 있다. 원하지 않는 것에는 허가가 필요 없다.

그래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정해진다.

아무도 깨우지 않는다. 계몽은 내 일이 아니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다만 이미 궁금한 게 있는 사람이 어디엔가 반드시 있다. 그게 시작해도 되는 일이라는 신호를 아직 못 받았을 뿐인 사람. 기록이 하는 일은 그 사람에게 여기도 길이 있다고 알리는 것 하나다.

그러려면 성공담만 남겨서는 안 된다. 잘된 것만 있으면 그건 허가가 아니라 부담이 된다. 이 정도는 해내야 하는구나가 되니까. 헤맨 기록이 같이 있어야 이렇게 헤매도 되는구나가 되고, 그게 허가다.


9. 아직 모르는 것

늦음이 조건이라면 얼마나 밀 수 있는 조건인가. 3장에서 던진 질문이었다.

밀 수 있는 층이 어디고 못 미는 층이 어딘지까지는 왔다. 그런데 여기까지 와서도 못 쓰는 문장이 하나 있다.

“늦어도 괜찮다”는 말이 위로인지 유예인지, 나는 아직 구분을 못 한다. 어떤 날은 그 말이 힘이 되고, 어떤 날은 그 말 뒤에 숨는다. 같은 문장인데 쓰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 완전히 다른 물건이 된다.

이건 다음에 다시 쓰겠다. 답이 생기면.

그리고 이 글도 결국 유희에 가깝다는 걸 안다. 그래서 다음 글은 실패한 것에 대해 쓰려고 한다.


연구소 이름을 정할 때 ‘늦’을 뺄까 한참 고민했다.

빼면 깔끔해지는 건 알았다. 붙여두면 내가 계속 그 단어를 설명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안 뺐다.

늦은 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믿어서가 아니다. 그때는 그렇게까지 믿지도 못했다. 그냥, 시작하는 자리에서 사실을 지우고 시작하면 그 뒤에 쓰는 게 전부 거짓이 될 것 같았다.

늦었다는 걸 이름에 박아두고 시작하는 것.

그게 내가 아는 가장 정직한 출발선이었다.


늦깎이연구소 · 시지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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