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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이 너무 많아서, 결정을 기록하기로 했다

결정이 너무 많아서, 결정을 기록하기로 했다

결정의 결과는 git에 남는데, 결정의 맥락은 어디로 가는 걸까.

어제 choviet 심사 응답을 어떻게 결정했는지 기억이 안 났다.
이틀 전 lbl_cafe24의 SEO 우선순위를 P0/P1/P2로 가른 이유도 흐릿했다.
일주일 전 healthnote 테스트 우선순위를 그렇게 잡은 까닭은 — 솔직히, 모르겠다.

분명히 그때는 이유가 있었다. 그때의 나는 납득해서 그 결정을 내렸다.
근데 일주일 후의 나는 그 이유를 못 찾는다.

뭔가 이상하지 않아?


성찰 — 9개의 프로젝트, 사라지는 결정들

내가 지금 굴리는 프로젝트가 9개쯤 된다.

프로젝트 상태
Choviet 앱스토어 심사 중 🔴
lbl_cafe24 리브랜딩 + SEO 25/100
HealthNote 테스트 커버리지 26% → 46% 작업 중
Silentia Phase 1 완료, 다음 결정 대기
KaiGo Coach v0.4
Tienlen 개발 중
policy-financing 운영 중
lbl-wordpress 콘텐츠 자동화
Ariadne 시작 단계

각 프로젝트마다 매주 결정이 일어난다.
합치면 한 주에 30~50건쯤 될 거다.
이건 추정이 아니라 실제로 세어본 거다.

이 중에 기록되는 것은 뭘까.

git commit message에 결과 한 줄.
blog post에 가끔 한 단락.
머릿속에 파편 몇 개.

이 중에 맥락이 보존되는 것은 — 거의 0건이다.

“왜 그때 그렇게 결정했는가?”
“그때 가능했던 다른 선택지는 무엇이었는가?”
“그 결정이 얼마나 압박 속에서 내려진 거였는가?”
“내가 그 순간 무엇을 알고 있었나, 그리고 무엇을 몰랐나?”

이런 질문에 일주일만 지나면 답을 못 한다.

근데 1년 후의 나는, 그 답이 필요할 거다.


믿음 — 결과만 남는 기록은 거짓에 가깝다

여기서 좀 무서운 걸 알게 됐다.

내가 1년 후에 나를 돌아본다고 가정해보자.
git log를 본다. blog post를 읽는다. PROJECTS.md를 본다.

거기엔 결과만 있다.

“choviet iOS 출시”
— 그때 어떤 압박이었는지는 안 적혀 있다.

“healthnote 테스트 커버리지 26% → 46%”
— 그날 어떤 다른 일을 포기했는지는 안 적혀 있다.

“lbl_cafe24 SEO P0 항목 5개 정리”
— 왜 다른 5개를 P1으로 미뤘는지는 안 적혀 있다.

결과만 남으면 사후의 나는 두 가지 함정에 빠진다.

하나, 잘된 결정과 잘된 결과를 헷갈린다.
운이 좋아서 잘 풀린 일을 내가 잘했다고 믿게 된다.

둘, 나쁜 결과를 본 결정을 무조건 후회한다.
그땐 그게 가장 합리적이었는데, 결과가 안 좋으니까 내가 멍청했다고 믿게 된다.

둘 다 거짓이다.
둘 다, 맥락을 잃은 채 결과로만 평가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학자들은 이걸 outcome bias라고 부른다.
어떤 도박 선수는 더 짧게 “resulting”이라고 부른다.
결과로 결정의 질을 평가하지 마라는 거다.

근데 사람은 그렇게 못 한다.
못 한다는 게 학계의 합의다.
유일한 방어선은 결정 시점의 맥락을 박제해두는 것 뿐이다.

문제는, 1인 운영자는 그걸 박제할 시간이 없다는 거다.
결정은 1주일에 50건씩 쏟아지는데, 그걸 다 기록하면 일을 못 한다.
기록 안 하면 사라지고, 기록하면 일이 멈춘다.

이게 내가 일년 동안 풀지 못한 문제였다.


욕망 — 그래서 엔진을 만들기로 했다

이름은 Ariadne.
그리스 신화에서 미궁에 들어간 영웅에게 실타래를 건넨 사람이다.

Ariadne는 결정해주는 AI가 아니다.
Ariadne는 답을 알려주는 시스템도 아니다.

Ariadne는 이미 한 결정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엔진이다.

내가 1년 후에 나를 돌아볼 때, 그때의 맥락이 그대로 살아 있도록.
운이 좋아서 잘 풀린 결정과 진짜 잘한 결정을 구분할 수 있도록.
실패한 결정도 그땐 합리적이었음을 확인하고 자책에서 풀려날 수 있도록.

처음엔 시니어와 다문화가족을 위해 만들려고 했다.
근데 분석하다 보니까 깨달았다.

가장 까다로운 사용자는 나 자신이었다.

9개 프로젝트를 굴리고, AI랑 매일 협업하고, 만성질환을 안고 사는 1인 운영자.
이런 사람의 결정이 맥락 없이 휘발되면 그건 그냥 정보 손실이 아니다.
자기 인생에 대한 추적성을 잃는 거다.

그래서 첫 사용자는 나로 정했다.
첫 어댑터는 Claude로 정했다.
그 다음은 차차 — healthnote, choviet, kaigo-coach 순으로.

신기한 건, Claude는 이미 내 결정 흐름에 깊이 들어와 있다는 거였다.
매일 같이 코드를 짜고, 같이 우선순위를 가르고, 같이 글을 쓴다.
근데 그 모든 결정이 세션이 끝나면 사라진다.
파편으로만 남는다.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에 이름을 붙이고 구조화하는 것.
새 도구를 만드는 게 아니라, 그게 Ariadne의 시작이다.


기록으로 남길 문장

결정의 결과는 어차피 남는다.
문제는, 결정의 맥락은 누가 남기느냐다.

어쩌면 이건 늦깎이연구소의 다른 모든 프로젝트랑 같은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기록하지 않으면 사라진다.
사라진 것은 돌아보지 못한다.
돌아보지 못하면 — 성장도, 연결도, 다음의 의지도 — 흐려진다.

그래서 시간을 기록한다.
그래서 결정도 기록한다.

다음 글에서는 이런 엔진이 이미 세상에 있는지, 왜 또 만드는지 를 적을 거다.
스포일러: 60년 된 학문이 비워둔 자리가 있다.


2026.04.08 — 늦깎이 개발일지 · Ariadne 시리즈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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