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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의 이탈

한 달에 한 번, 첫째 아들과 단둘이 평일에 빠져나오기로 했다.

거창한 계획은 아니다. 처음엔 그냥 이런 생각이었다. 아이한테 평일의 이탈을 한 번 경험하게 해주고 싶다.

생각해보면 아이한테 평일은 늘 정해진 트랙이다. 학교 가고, 학원 가고, 시간표대로 움직인다. 그 트랙에서 아빠가 손 잡고 “오늘은 안 가도 돼” 하고 빼내주는 경험. 그게 아이한테 주는 건 여행지가 아니라 세상은 규칙대로만 굴러가는 게 아니라는 감각이다.

평일에 텅 빈 곳에 가보면 아이가 느낄 거다. 다들 일하고 공부하는 시간에, 나는 아빠랑 여기 있다. 이 약간의 위반 같은 느낌. 그게 오래 간다. 나중에 어른이 돼서 힘들 때 “아, 그때 아빠랑 평일에 도망쳤었지” 하고 떠올릴 한 장면이 되는 거다.

가르치려는 게 아니다

오해는 말자. 나는 뭘 가르치려는 게 아니다.

내가 누구를 가르치겠나. 나보다도 큰 아이를, 나 같은 작은 어른이 뭘 가르칠 수 있겠나. 단지 좀 더 일찍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는 환경을 하나 열어주고 싶을 뿐이다.

평생 매달릴 일은 누가 찾아서 쥐여줄 수 있는 게 아니다. 부모가 “이거 해봐” 한다고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아이가 스스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순간을 반복해서 겪다가 어느 날 발견하는 거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정답을 찾아주는 게 아니다. 발견이 일어날 수 있는 여백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평일의 이탈이 정확히 그 여백이다.

학교와 학원은 본질적으로 정해진 걸 잘하는지 보는 곳이다. 거기선 아이가 뭘 좋아하는지 안 보인다. 평가가 깔려 있으니까. 근데 평일에 아빠랑 텅 빈 데 나오면, 처음으로 아무도 점수 안 매기는 시간이 생긴다. 그 시간에 아이가 뭘 하는지를 본다. 어디서 발이 멈추는지, 뭘 물어보는지, 뭘 보고 눈이 커지는지.

여행지가 아니어도 된다

처음엔 여행을 떠올렸다. 근데 생각을 좀 더 밀어보니 굳이 여행지가 아니어도 됐다.

나의 사무실이어도 된다. 지인의 사무실이나 작업 공간이어도 된다. 봉사활동도 좋은 예다. 만남이 있는 자리면 어디든 좋을 것 같았다.

여행지는 결국 구경이다. 풍경을 소비하는 거다. 근데 만남은 결이 다르다.

아이가 평생 매달릴 일을 찾으려면 결국 사람이 뭘 하며 사는지를 봐야 한다. 교과서 속 직업은 추상적이다. 근데 내 사무실에 데려가서 내가 일하는 걸 옆에서 보면, 지인 공간에 가서 그 사람이 자기 일에 빠져 있는 걸 보면, 봉사 현장에서 누군가를 돕는 시간을 같이 보내면 — 그건 살아있는 직업이고, 살아있는 태도다. 아이는 그걸 몸으로 흡수한다.

특히 봉사가 좋다. 거긴 뭘 받느냐가 아니라 뭘 주느냐의 시간이다. 아이가 자기보다 어려운 사람을 처음 마주하는 경험, 그리고 작은 도움이 누군가한테 닿는 걸 보는 경험. 그건 진로 이전에 사람의 결을 만든다.

결국 내가 열어주려는 건 장소가 아니었다. “세상엔 이렇게 사는 사람도, 저렇게 사는 사람도 있다”는 풍경 그 자체다. 한 달에 한 명씩, 한 자리씩. 그 만남들이 쌓이면 아이 안에 자기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에 대한 윤곽이 생길 거다.

문 하나 열어주는 일

나는 늦깎이로 개발도, 디자인도, 글도, 마케팅도 혼자 한다. 그거 누가 “이거 해라” 해서 된 게 아니다. 살면서 쌓인 단서들이 병을 겪고 나서 터진 거다.

아이도 똑같을 거다. 단지 나는 그 발견을 쉰이 넘어서 했고, 아이한텐 더 일찍 그 여백을 줄 수 있다. 그게 내가 아이한테 줄 수 있는 진짜 선물 같다.

조급해하지 않으려 한다. 평생 매달릴 일은 열두 번 만에 안 나온다. 근데 아무도 안 보는 시간에 나를 들여다보는 경험은 그 자체로 이미 자아의 첫걸음이다.

대단한 걸 해주려는 게 아니다. 그냥 평일 아침에 손 내밀어서 “오늘은 다른 데 가볼까” 하면 된다.

들어갈지 말지, 어디로 갈지는 아이 몫이다. 나는 문 하나 열어주면 된다.

나머지는 아이랑 시간이 알아서 할 거다.


아빠가 건네는 삶의 지혜를 오랫동안 간직하도록 · 늦깎이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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