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늦깎이다. 이제는 숨기지 않는다.
남들이 커리어를 쌓을 때 나는 병원에 있었다. 남들이 속도를 낼 때 나는 멈춰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오래 부끄러웠다. 뒤처졌다는 말이 꼭 내 이름 같았거든.
근데 말이야, 병상에서 알게 된 게 하나 있다. 시간은 길이가 아니라 밀도라는 것. 빨리 달리는 사람은 풍경을 지나치고, 늦게 걷는 사람은 다 본다. 아이 표정이 바뀌는 순간. 아침 빛이 방바닥에 닿는 각도. 빠를 땐 안 보이던 것들이, 늦으니까 보이더라.
늦게 시작한 사람에겐 이상한 힘이 있다. 왜 시작하는지 아는 힘. 젊은 날의 시작은 절반쯤 관성이잖아. 남들이 하니까, 해야 하니까. 늦은 시작은 다르다. 하나하나가 선택이거든. 나는 지금 코드를 짜고, 글을 쓰고, 프린터로 장면을 찍는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다. 이게 내 시간을 기록하는 방식이라서다.
잘 팔리는 그림 말고, 오래 남는 장면부터 찍겠다고 정한 것도 그래서다. 빨리 갔다면 못 만났을 문장이다.
아이들이 가끔 묻는다. “아빠는 왜 이제 시작해?” 나는 답한다. “이제 알았거든. 뭘 하고 싶은지.” 아이들은 그냥 고개를 끄덕인다. 아이들의 세계엔 시작하기 늦은 때라는 게 없으니까.
당신도 있잖아. 너무 늦었다고 접어둔 것. 근데 그거, 접힌 채로도 사라지지 않았잖아. 그게 증거다. 아직 하고 싶다는 증거.
늦게 시작한 사람은 뒤처진 게 아니다. 다른 시계를 차고 있을 뿐이다. 그 시계는 남과 비교하는 법을 모른다. 어제의 나하고만 비교한다. 그래서 매일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간다.
꽃은 피는 순서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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