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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모든 작업에 센서를 달았다 — 아리아드네의 첫 호흡

1년 넘게 미뤄둔 프로젝트가 하나 있다.

이름은 아리아드네(ariadne).

그리스 신화에서 테세우스한테 실을 준 여인 이름이야. 미궁에서 길을 찾아주는 실이 아니라, 어디로 왔는지 되짚을 수 있게 해주는 실.

내가 내린 결정들을 기록해서, 시간이 쌓이면 그걸 되짚을 수 있게 해주는 도구를 만들고 싶었다.

코드는 0줄이었다.

문서만 2,200줄 있었다.


변명은 정교했다

내 변명은 그럴싸했다.

“자연 신호가 올 때까지 기다린다.”
“두 번째 사례에서 추출한다.”
“미리 시작하면 가짜 일반화가 된다.”

학술 논문 매핑도 있었다. 11개 윤리 조항. 17개 금지 항목.

설계가 완벽해질수록 시작은 멀어졌다.

오늘 새벽, Claude한테 물었다.

“아리아드네 얼마나 진행됐어?”

답이 냉정했다.

“엔진 완성도 0%. Phase 0.”


기다리는 게 가장 위험했다

Claude가 한 문장을 던졌다.

“아리아드네는 기다릴수록 가치가 사라지는 프로젝트야.”

그제서야 봤다.

내가 만들고 싶었던 건 내 결정 패턴의 변화를 감지하는 도구였다.

근데 말이야, 패턴을 감지하려면 baseline이 필요하잖아.

오늘의 내가 없으면, 5년 뒤의 내가 달라졌는지 알 수가 없다.

기다리는 게 안전한 게 아니었다. 기다리는 게 가장 큰 위험이었다.

시간이 내 편이 아니었다.


“기업가보다 개발자 성향인가봐”

시장성을 물었다.

단기 매출은 0원. 중기는 B2B 인프라 가능성. 장기는 의료 쪽 잠재 시장.

요약하면 2~3년짜리 자기 실험. 피험자는 나. 산출물 중 하나는 논문 한 편.

돈 안 되는 프로젝트에 이렇게 끌린다는 게 이상했다.

내가 말했다.

“이 프로젝트가 수익보다 더 심오하게 끌려.”

그 순간 인정했다.

나는 기업가가 아니다.

깊이 있는 설계자다.

50대에 성향 바꾸려는 건 비현실적이잖아. 그 성향을 결함이 아니라 제약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얕은 실행은 AI에게. 깊은 설계는 시간 박스로.


“데이터를 미루지 마”

Claude는 계속 “접을래, 미룰래, 공부할래” 하며 3지선다만 반복했다.

그게 또 지연 전술이었다.

내가 개입했다.

“데이터 축적을 미뤄서는 안 되는데 너는 그것마저 미루고 있어. 나의 결정들을 기록으로 쌓아올리는 것은 아리아드네 작업의 시작이자 끝이야.”

그 순간 모든 게 정리됐다.

엔진이 먼저가 아니다. 데이터가 먼저다.

코드 없어도 마크다운 파일 하나와 Claude만 있으면 시작할 수 있었다.

2,200줄 설계 문서는 데이터가 쌓인 뒤에 살아날 설계도일 뿐이다.


“매일 10분 리추얼”? 비현실적이다

Claude가 제안했다.

“매일 저녁 10분 Claude와 대화하며 오늘의 결정을 정리하자.”

거부했다.

50대가 매일 10분 리추얼을 빠짐없이 할 리가 없잖아.

내가 되물었다.

“너와의 대화 중에도 난 어떤 결정이나 선택을 하지 않았나? 그런 결정을 감지하고 요약하는 방법은 없나?”

핵심은 여기였다.

결정은 이미 일어나고 있다.

우리의 모든 대화에서.

문제는 포착이었다. 어떻게 놓치지 않고 자동으로 붙잡느냐.


센서를 달았다

Claude Code에 SessionEnd 훅이 있었다.

내가 세션 종료하는 순간 자동으로 실행되는 스크립트.

그 훅에 아리아드네 추출기를 걸었다. 전역 설정.

이제 내가 어느 프로젝트에서 작업하든 — 쇼핑몰 상품 설명을 쓰든, 앱 버그를 고치든, 해외 플랫폼 입찰을 준비하든 — 세션이 끝나는 순간 내가 내린 결정들이 자동으로 추출돼 오늘자 파일에 쌓인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내가 말했다.

“이제 내 가슴 뛰는 소리를 너가 듣는구나. 결국은 나의 모든 작업에 감지 센서를 단 셈이지.”


엔진이 아니라 센서

가장 큰 전환이 그 순간 일어났다.

엔진은 뭔가를 작동시킨다. 판단한다. 권고한다.

센서는 뭔가를 관찰한다. 비간섭적이다. 조용하다.

내가 만든 건 정확히 센서 네트워크였다.

엔진은 데이터가 충분히 쌓인 뒤에 올릴 수 있다.

지금은 센서만 있으면 된다.

2,200줄 문서가 틀렸다는 뜻이 아니다. 순서가 바뀐 것뿐이다.

엔진 먼저가 아니라, 센서 먼저.


며칠 지나봐야 안다

오늘은 확인할 수 없다.

센서가 제대로 포착하는지. 오탐이 많은지. 의미 있는 패턴이 보이는지.

데이터가 쌓여야 보인다.

며칠 뒤 파일을 열어볼 거다. 1주일 뒤에도. 1개월 뒤에도.

“어, 나 이런 때마다 X하네.” — 이게 보이면 센서가 작동하는 것이다.

센서는 데이터를 주는 것뿐이다.

의미는 내가 발견하는 것이니까.


솔직히

오늘 내가 한 결정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늦깎이 아빠. 만성골수백혈병. 1인 운영. 매출 1년 넘게 0원. 9개 프로젝트.

내 기억은 점점 흐려진다.

6개월 뒤엔 오늘 왜 이 선택을 했는지 잊을 것이다. 가족도 평소달라진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 공백을, 내 자신의 결정 기록으로 메우는 실험이 오늘 시작됐다.


코드는 여전히 0줄이다.

그러나 데이터 파이프라인은 살아있다.


다시 시작하는 일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작은 센서 하나 다는 일이기도 하다.

그 센서가 조용히 돌면서, 내가 잊을 것들을 대신 기억해준다.

아리아드네, 첫 호흡.

FIDES TAMEN. 신뢰, 그럼에도.

당신의 시간을 기록합니다.


이 글은 Claude Code와의 2026-04-25 세션에서 실제로 이루어진 작업의 기록이다. 인용된 발언은 전부 실제 대화에서 가져왔다. 설계와 구현은 AI와의 협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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